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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있는 말씀이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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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텐베르크 이래로, 세상은 생각의 호수에서 생각의 바다로 바뀌었다. 생각은 누군가의 머리에서 나와, 누군가의 머리로 들어가 잠시 묵다가 다시 나간다. 먼, 과거에는 들어오는 생각 하나 하나가 (희)귀한 것이었을 것이다. 귀한 손님이다보니, 머무는 시간이 길었고, 그러다 보니 나갈 때는 언제나 주인의 대접으로 조금씩 변화된 모습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인간의 기억력의 불완전성 때문에, 들어올 때 모습과 나갈 때의 모습이 완전히 같은 경우는 오히려 드물었을 것이다. 대중 매체의 발달로 사정이 달라졌다. 생각들은 하루에도 몇톤씩 쏟아져 머리속에 퍼부어지게 되어, 더이상 귀한 손님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들어오는 생각들의 가치는 하나 하나 깊게 검토되지 못하고 그 생각을 발설한 사람의 인상, 지위 등에 의해 좌우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럴싸하게 느껴지는 생각들은 행여라도 틀릴새라, 들어온 그대로 내보내기에-이렇게 함으로써 "유"식을 자랑하기에- 급급하게 되었다. 상업주의는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머리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들이 들어가고, 재빨리 나간다.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니, 나갈 때에는 자기의 머리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은연중에 착각하게 되어 버렸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캐치프레이즈에 불과한 주장을 - 예컨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던가, "멕아더는 살인마다" - 를 외치는 자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 더욱이 21세기의 어느 하루, 거의 모든 인간의 뇌의 일부가 실리콘 기계덩어리-망각의 은혜를 모르는-로 대체되어 버렸다. 이제 인터넷 상의 글쓰기는 Ctrl-C와 Ctrl-V가 상당부분 대체하게 되었다. 쏟아져 나오는 글들을 "중복 제거"의 기준으로 정돈하면 도대체 얼마만큼의 글들이 남을까? 내가 이 블로그를 쓰며 다짐하는 것은, 내 머리속에 있는 것들의 출처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내" 생각을 쓰되, 불가피하게 남의 생각을 인용할 때는 확실하게 인용하여 누구라도 참고할 수 있고 나의 생각의 뿌리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밥을 먹어야 살수 있듯이, 남의 생각을 듣지 않고는 자신의 생각도 할수 없다. 따라서 남의 생각을 듣는 것 자체는 꼭 필요한 행위이다. 그러나, 밥이 들어가서 밥만 나온다면 그것은 이미 생물이 아니고 "보온밥통"에 불과하듯이, 들어간 생각이 그대로 나오는 머리라면 이미 사람의 머리는 아닐 것이다. 외부 링크들 |
2008년 08월 02일
개를 키우는 사람은 개를 자기의 친구라고 한다.
그래서 개들은 팔린다, 마치 친구가 돈때문에 배신당하듯이. ![]()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은 고양이를 자기의 가족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고양이의 반려자는 함께 할 수 없는 사정이 생기면 고양이를 다른 집에 입양시킨다. ![]()
2008년 05월 20일
지은이: 발터 크래머
옮긴이: 권세훈 출판사: 이지북 발행일: 2002. 3. 13.(초판) 사 놓고 한참 된 책인데, 오늘사 다 읽었다. 특별히 새로운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것을 리마인드 시켜 주는 점은 좋았다. 몇가지만 적어 두자면, 몬티 홀 문제, 중국식 주사위 문제 등이 그러하다. 끝으로, 씁쓸한 뒷맛을 남긴 구절 하나만 인용해 둔다. 174쪽 첫째 줄 이하. 남녀 성비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다. 인도, 한국, 중국 등 지구촌의 일부에서는 벌써 이러한 경향이 시작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2008년 04월 08일
박정세 지음 1996. 4. 10. 1판1쇄 1996. 10.31. 1판2쇄 연세대학교 출판부 의외로 재미있는 책이다. 성서의 내용과 한국의 민담 간에 의외로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저자의 견해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바로 천지왕 본풀이에 대한 견해이다. 일단 천지왕 본풀이의 내용 중 일부를 간단히 보자. 천지왕 본풀이는 놀라울 정도로 성서의 천지창조 설화와 비슷하게 시작한다. “태초에 천지는 혼돈으로 있었다. 하늘과 땅이 금이 없이 서로 맞붙고 암흑과 혼합으로 휩싸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 (중략) … 하늘과 땅 사이는 금이 생겨났다.” 그러다가 옥황상제가 등장한다. “이때 하늘의 옥황상제 천지왕이 해도 둘, 달도 둘을 내보내어 천지는 활짝 개벽이 되었다.” 그러다 뜬금없이 결혼을 한다. “천지왕은 지상의 총맹왕 총맹부인과 천정배필을 맺고자 지상으로 내려왔다” 성서의 창세기 내용과 비슷하게 나가다가 갑자기 복음서를 연상시키는 내용으로 비약한다. 아무튼 이런 천지왕 본풀이에 대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언제부터 누가 이 본풀이를 시작하고 또 전수하기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매우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무속종교는 고대 한국의 시작부터, 아니 그 이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논리적으로 오류이다. 일단 무속종교는 고대 한국의 시작부터, 아니 그 이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저자의 서술은 나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 “천지왕 본풀이”도 마찬가지로 오랜 역사를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설의 역사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설화는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일단 오래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천지왕 본풀이 설화는 문헌 등으로 확실히 알 수 있는 다른 설화와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삼국유사 등 다른 문헌에서 이와 유사한 설화조차 전혀 소개되어 있지 않은 점도 의심스럽다. 내 생각에는, 이 천지왕 본풀이는 천주교 전래 이후에 기독교의 천지창조설화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2007년 11월 08일
박종현 지음, 시공사 2005. 11. 2. 발행
2007년 11월 05일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반공"과 "반일"은 절대선이었다.
"반공"이나 "반일"이라는 명분 하에 저지른 일이라면, 아무리 어처구니 없는 행동도 용서가 되었다는 뜻이다. 양자 사이에 굳이 우열을 가리자면 아무래도 반공이었던 것 같다. 근래 과거의 반공 만능주의는 완전히 사라진 것 같다. 오히려, 반공을 외치는 사람이 바보취급을 받는 시대가 온 것 같다. 그럼에도 "반일 만능주의"의 망령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더 기승을 부리는 것 같다. "반일"이라는 정서를 자극할 수만 있다면, 어떠한 오류도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는 그런 사회 말이다. 여기에는 좌와 우가 따로 없는 것 같다. 오늘자 한겨레 신문을 보니, ‘난징학살’ 날조 주장 일 사학자에 ‘유죄’ 라고 떴다. 도대체 무슨 죄로 처벌을 받았나 하고 놀라서 보니, 명예훼손을 이유로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설마 기자 씩이나 되어가지고, 손해배상 판결과 벌금형 판결을 구별하지 못할 리는 없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오류를 지적했다. 그리고 한시간여 뒤, 정정 여부를 살피기 위해 다시 한겨레 홈페이지를 들어 가니 기사는 정정되지 않았다(대신 대문에서는 내려져 있었다)." 이정도 오류는 무시해도 좋다는 발상인지, 심히 우울하다.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247969.html
2007년 08월 18일
쓸데 없이 영어를 회화에 섞어 쓰는 것을 듣는 것은 매우 역겹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의 언어생활 속으로 녹아들어가 우리말처럼 되어 있는 것을 모 기관에서 억지로 한글화한 것은 더 듣기 역겹다. 뭐랄까, 권위주의적 사고방식의 잔재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국민의 언어생활도 좌우할 수 있다"는 오만의 발로이며, 국민의 정신마저도 국가가 임의로 개조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상통하기 때문이다. 오늘 모 신문의 머릿기사를 보니 이런 표현이 나온다.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8180104&top20=1 "한국 젊은인재 키우기 위해 교육사업에 다걸기 하겠다" 여기서의 "다걸기 하겠다"는 "all in 하겠다"를 순화한 표현인 것 같은데 굳이 억지스럽게 "all in"을 "다걸기"로 1:1 대응시킬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바치겠다" 내지는 "모든 것을 걸겠다" 정도로 바꾸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2007년 07월 27일
2007년 07월 22일
제목은 "최근"이지만, 실상 이 책은 70년 전의 세계 일주기이다.
이 책의 저자 이순탁은 일제 때 연희 전문학교의 경제학 교수로, 1937년 안식년을 맞이하여 세계일주를 하여 이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이 책이다. 여러가지로 감상이 많은 책이다. 특히 독일을 둘러 보고 제2차 세계대전을 예언한 부분, 이미 미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사고방식, 부실한 미국 유학생이 당시에도 구설수에 올랐다는 점 등이 이채로왔다.
2007년 03월 16일
나루사와 아키라 지음, 박경수 옮김
재미있는 대목 두개만 인용해 둔다. 50페이지 하단 "세간 사람들의 마음에도 없는 날을 축하한다고 정부에서는 억지로 붉은 환약 파는 가게의 간판 같은 깃발(일장기)과 등을 내걸게 하니 더 더욱 모를 이치" 109페이지 하단 "메이지 군대에서도 감시의 눈길은 극히 세부적인 부분에까지 파고들었다. 그 철저함이 "고환은 바지 왼쪽으로 넣어야 한다"(陸軍省, [被服手入保全法] 제3장[著裝], 1917)와 같이, 때로는 극단적인 엄격함을 넘어 해학의 영역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2007년 03월 09일
어떤 분야의 전문가라고 해서 다른 분야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이점을 착각하면 말년에 망신 -그야말로 몸을 망침-을 당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분야의 전문가가가 자기의 좁은 전문분야에 웅크리고 앉아 바깥 쪽 일에 일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결국 한계가 문제인바, 오늘 아주 아름다운 예를 발견하고 기록으로 남겨 둔다. 지진학자 데라다 도라히코가 쓴 수필의 한 구절이다(가노 마사나오 著, 김석근 譯; 근대 일본사상의 길잡이 304페이지에서 재인용) 거대한 지진, 거대한 화재의 한가운데, 폭도가 일어나 도쿄의 우물에 독약을 뿌리고, 주요한 건물에 폭탄을 던지고 있다는 말이 나돌았다 한다. 그럴 경우, 시민의 대다수가 만약 다음과 같은 것을 한 번쯤 생각해 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예를 들면 시중의 우물의 10%에 독약을 뿌린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그 우물물을 어떤 한 사람이 한 번 마셨을 때, 그 사람이 죽는가, 심한 꼴을 당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농도에 그 독약을 섞는다고 하자. 그럴 때에 과연 어느 정도 분량의 독약을 필요로 할까…. 이른바 과학적 상식이라는 것에서 오는 막연한 개념적 추산만 해 보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많은 분량을 필요로 하는가 하는 상상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폭도들은 지진 이전부터 상당히 많은 독약을 비축해 두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설령 그 정도의 준비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다음부터가 중요하다. 몇 백 명, 혹은 몇 천 명의 폭도들에게 일일이 부서를 정해서, 독약을 건네 주고, 각 방면에 파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도 그것이 가능했다고 하자.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통을 짊어지고 나간 다음에, 자신에게 주어진 곳의 우물 위치를 찾아 가지 않으면 안된다. 우물을 발견하고서, 그런 후에 사람들이 보지 않는 기회를 노려서, 마침내 독을 투하한다. 하지만 유효하게 되기 위해서는 대략 우물물의 분량을 가늠한 다음 투입할 분량을 가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것을 투입한 다음, 용해되어 잘 섞이도록 휘젓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데라다는 "적당한 과학적 상식은 일에 임해서 우리에게 '과학적인 성찰의 기회와 여유'를 준다. 그 같은 성찰이 행해지는 곳에는 이른바 유언비어 같은 것은 현저하게 그 열기와 전파능력이 약해지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에게는 '유언비어'에 쉽게 놀아난 그 사건을 '문화적 시민으로서 심히 부끄러운 일'로 보는 감각이 있었다. 그런 만큼 이렇게 잘라 말한다. "만약, 어떤 기회에 도쿄 시중에, 어떤 유언비어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면, 그 책임의 적어도 절반은 시민 자신이 지지 않으면 안된다"
2007년 02월 11일
혈세라는 단어는 정의하기가 용이하지 않다.
다만 "국민의 혈세를 낭비한다"라는 전형적인 쓰임새에서 그 의미를 유추해 볼 때 국민의 피와도 같은 고귀하고 아까운 돈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혈세"는 아무래도 영어의 "blood tax"의 오역인 것 같다. 이 blood tax는 한마디로 "병역의 의무"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구글에서 "blood tax"로 검색해 보면 그러한 용례를 아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이 단어는 --많은 근대의 개념들이 그러했듯이-- 일본에서 번역하여 한자화한 단어인데, 그 사용 과정에서 웃지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즉, 메이지정부가 징병령을 공표하며 혈세 운운한 것을, 당시의 민중들이 정말로 피를 뽑아가는 것으로 착각하여 징병령에 거세게 저항하는 일대 소동의 원인이 된 것이다.(김필동; 근대 일본의 출발, 일본어 뱅크 100페이지 참조) 인터넷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http://www.east-asian-history.net/textbooks/MJ/blood_tax.htm) 만약 예전부터 쓰던 한자숙어였다면 위와 같은 엉뚱한 저항은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위 단어는 근대에 일본에서 번안되고, 와전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한다.
2007년 01월 10일
대부분의 학문은 그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물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함에 반해, 법학은 대상을 바꿀 수 있다.
요컨대, 법학의 대상이 되는 "법"은 형식적으로는 국회에서 이를 바꿀 수 있으며, 실질적으로는 법원에서 이를 바꿀 수 있다(법원의 실질적 법창조!). 자신의 존립의 궁극적 근거마저도 스스로 규정할수 있는 유일한 학문이 바로 법학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법학은,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법학자 내지는 실무 법조인들은, 오만하기 이를데 없는 언사를 무의식중에 내뱉는다. 예로써 표절의 문제를 놓겠다. 한 창작물이 다른 창작물의 영향을 받아 일부 모방이 있었다고 하자 그 모방의 양과 질에 따라 명백한 표절에서부터 거의 완전한 독립적 창작물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일한 모방의 정도에 대하여도 판단의 주체에 따라 다양한 판단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법학은 자신만이 절대적 진리인양 강요한다. 이제 구체적으로 법학의 오만이 나타나는 상황을 보자. 어떤 창작물이 논의의 대상이 되어, 논의에 참가하는 사람마다 표절 여부를 놓고 진지한 논의가 오고 가는 상황이다. 이때 불쑥 어떤 법률가가 나타나 짜증스럽다는듯이 툭 내뱉는다. "표절이라 함은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한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는 이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표절이 아니다" 그리고 더이상의 논의는 무의미하다는듯한,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무식함을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리를 뜬다. 이어지는 내용
2005년 12월 09일
길지 않은 임상 경험을 토대로 말하자면, 실무 법률가(이른바 "법조인")들에게는 고유한 직업병이 있다.
물론, 모든 직업병이 다 그렇듯이, 어느 직업에 종사한다고 반드시 그 직업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모든 법조인들이 다 직업병 환자는 아니라는 말씀. 먼저 판사 - 아는 체 병 판사라는 직업은, 성격상 "모르겠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그래서 "입증책임"이라는 도피처가 존재한다). 그러나 쏟아지는 사건들은 모두 법관에게는 "생전 처음 보는" 사건이다(법관이 사건의 당사자인 경우 "제척사유"에 해당하여 사건에서 배제된다). 게다가 증거의 부족 등으로 사실관계가 아리송한 경우가 대부분이다(사실관계가 명확하다면 분쟁이 소송으로 발전하지도 않는다). 더욱이, 조금만 전문적인 사건이 닥치면 판사의 머리는 백지상태가 된다(왜냐하면 사안 자체를 이해하기 위한 전문지식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대학에 들어오자 마자-요즘은 수시합격한 고3조차도!- 오로지 수험공부만 해야 조기에 합격하게 되는 현 시스템 하에서, 법조인만큼 무식한 직업군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럼에도 판사들은 어떻게든 이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는 숙명을 지고 있다. 결국, 몰라도 아는체하며 판결문을 쓰는 버릇이 몸에 배어서, 나중에는 일상생활에서조차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체 하는 것에 도가 트는 것이 바로 판사들의 직업병 다음 검사 - 의심병 검사가 만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범죄자. 상식적으로 대한민국 사람 대부분은 선량한 사람이고 예외적으로만 범죄자이다. (대한민국의 범죄는 연간 200만건, 그러나 대부분은 과실범이나 단순폭행 정도에 불과하며, 범죄 다운(?) 범죄는 많지 않다. 그나마, 그 범죄 다운 범죄를 짓는 자의 상당수는 재범 3범이어서 중복하여 계산된다.) 그럼에도 검사는 직업적으로 늘상 범죄자만 만나다 보니 이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범죄자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잊혀져버리는 헌법상의 대원칙 "무죄추정" 의심병 말기의 검사는 마침내 피의자에게 "네가 혐의 없음을 입증할 증거를 내라"고 닥달하기에 이른다. 중병이다. 끝으로 변호사 - 허풍병 사무실을 노크하는 모든 의뢰인에게 큰소리 친다. 무조건 이긴다고. 어떨 때는 번연히 질 것이 보이는 사건에도 감언이설로 이길 듯이 설명하고는 착수금을 챙긴다. 당연히 이길 사건을 맡으면 거꾸로 자기 아니면 이길 수 없는 것처럼 공갈을 쳐서 두둑한 성공보수를 챙긴다. 그런데 법조인의 직업병에는 놀라운 성질이 있다. 요컨대, 판사든 검사든 옷을 벗자마자 종래의 질병이 완치되고 대신 허풍병에 걸린다는 사실.
2005년 12월 09일
제목이 어수선하게 긴데,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내용이 도저히 한 줄로 압축이 되지 않아서 부득이 저렇게 썼다. 한자로 쓴 이유는 "현금"의 의미를 오해할 것 같아서이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간다. 중고등학교 교과과목으로 말하자면, 수학이나 물리와 같은 과학 과목과 윤리나 국사와 같은 사회과 과목을 비교했을 때 월등 전자가 후자보다 공부하기 힘들다. 공부하기 힘들다보니 교육자들은 거꾸로 "과학은 재미있다"는 식으로 학생들에게 호소한다. 예컨대 신기한 실험을 보여준다거나, 첨단과학을 응용한 제품을 보여주며 "이것이 과학이다"라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과학교육의 보급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여 주었을지 모르겠으나, 효용보다는 오히려 막대한 폐해를 낳았다고 본다. 1. 과학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과학의 진수는 "합리적인 사고과정"이지 그 사고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후자를 과학으로 착각한다. 따라서 십수년간 과학을 공부해도 과학적 사고방식은 머리속에 전혀 자리잡지 못한다. 2. 과학자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과학자를 발명가와 혼동시켜버린다. 비과학도들이 과학하는 이들에게 "결과물"을 재촉하는 나쁜 습관을 가지게 만들었다. 3. 과학자에 대한 사회적 대우를 악화시켰다. 과학자들은 재미로 과학을 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이런 오해는 어느정도 성공을 거둔 과학자 스스로가 확산시키는 경향도 있다. 즉, H모씨의 표현을 빌면 "이렇게 재미있는 것을 하면서 돈(필자 주: 40만원-이건 최저임금도 안된다-)도 준다"는 식이다. 이 부분이 화가 나서 한마디만 덧붙인다. 그럼, 판사, 검사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에게 월 40만원만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까?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게 해 주겠다. 거기에 덧붙여 용돈으로 월 40만원을 주겠다." ===================================================== 왜 힘든가? 다음의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흔히들 드는 이유로, 전자는 단순암기로 끝나지 않는데 비해 후자는 암기만으로 끝나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글쎄, 꼭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은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지 못한 지적이다. 내가 다년간 학생을 지도하며 깨달은 것은 "전자는 정확한 답을 요구하는데 비해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전자가 공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자세한 내용은 시간이 되는대로 차후에 더 쓰겠다.
2005년 11월 23일
현재 시간 2005. 11. 23. 22:21
헌법재판소는 내일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특별법에 대한 위헌소송의 결정을 선고할 예정이다. 어떤 내용의 결정이 나올지 현재로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법원(헌법재판소를 포함한)은 법을 해석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하는 국가기관이다. 법원의 작용이 법의 "창조"가 아니라 법의 "해석"이라면, 법원의 법의 "해석"에 대하여는 (모든 국민이 납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훈련을 거친 자라면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객관적인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의 법해석이라면, 그 법은 더이상 법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법관들의 머리속에만 있는 법 -이것은 비밀스런 종교의 오의와도 같은 것이 될 것이고- 이 대한민국을 지배한다면 대한민국은 저 12표법 이전의 로마만도 못한 나라라는 평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현실은 어떠한가? 법관들의 법 해석을 다른 법조직역 -검사든 변호사든-이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오해가 없도록 요점만 간단히 부연하자면, 이 문제는 법해석에 있어서의 의견차이와는 다른 문제이다.) 거의 동등한 교육과 훈련을 받은 사람조차도 어떤 법관의 법 해석에 납득할 수 없다면, 이는 더이상 법의 해석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법의 창조이다. 헌법재판소 선고를 몇시간 앞둔 이 시점에, 그 "법"(이 사건 같으면 헌법)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될지 그야말로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경우에도 법원은 법을 해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솔직해지자, 대한민국의 법원은 법을 창조하고 있는 곳이다. 이런 내 생각이 맞다면, 대한민국은 그 점에 있어서는 고대 로마만도 못한 나라이다. (아, 물론 나는 법원의 법규 창조력은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법원에는 "민주적 정당성"을 거의 전혀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족이지만 오해가 없도록 부연한다. 나는 이 사건에서의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무엇이 되건 그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다.
2005년 11월 02일
어제 슈퍼에서 빙초산이 진열된 것을 보았다.
한 병을 무심히 들고 보니, 병이 60퍼센트 정도만 채워져 있었다. 잘 안팔리는 물건이어서 오랫동안 진열되다보니 증발한 것일까 하고 제조일자를 보니, 웬걸 2005년 10월에 제조된 신품이었다. 혹시나 하고 다른 병을 보니 큰병 작은 병 할 것 없이 모두 60퍼센트 정도만 채워져 있었다. 왜 그런 것일까 하고 생각을 해 보았다.
2005년 11월 01일
과거에는 인간들의 생활에 변화가 적었다.
따라서, 인간들이 쓰는 물건의 품목도 늘 일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제조업자는 고정된 품목의 물건을 만들 수 밖에 없었고, 승부는 품질에서 가려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과거에은 없던 물건"도 팔리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궁리하기에 앞서, 어떤 물건들이 만들면 팔릴 것인가를 궁리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2005년 10월 27일
고등학교 2학년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의 형이 미용실에 머리를 자르러 갈 때 따라간 나는 거기서 한 권의 잡지를 보았다. 미용업 종사자 사이의 회보였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거기에는 이러한 요지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업소에 음식을 배달시켜 먹어서는 안된다. 미용실은 여성의 꿈을 가꾸어 주는 곳, 생활의 냄새를 풍겨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나는 벼락을 맞은 듯 전율했고, 지금도 그 문구 "생활의 냄새"를 잊을 수 없다.
2005년 10월 18일
예컨대, 이경규를 처음 보는 사람이 "아, 하마터면 손석희씨로 착각할 뻔 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해 보자.
이 말은 대략 "당신은 손석희와 혼동되는 외모를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의미로 쓰는 것이지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왜냐하면 착각이라고 하는 현상은 외계에 대한 주관적 심상의 즉각적, 찰나적 오류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착각했다면 위 표현은 거짓말이고, 착각하지 않았다면 -그는 구별할 능력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착각할 뻔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나타나는, 객관과 주관을 혼동한 표현이라고나 할 것이다. 이런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오해가 빚어지는지.
2005년 09월 10일
인문 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자연과학에 대한 태도는 대체로 다음 둘 중의 하나인 것 같다.
無視(무시) 아니면 無知(무지)가 바로 그것이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천부당 만부당한 얘기이다. 서양의 “대”철학자-이를테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하여 데카르트, 라이프니츠를 거쳐 화이트헤드, 러셀 등-들이 자연과학(수학을 포함한)의 대가들이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당대 최고 수준의 과학지식에 대한 이해 없이는 창조적인 철학이라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과학의 든든한 뒷받침 없는 철학은 그야말로 다른 철학자들이 뱉어 놓은 언설에 대한 주석달기 아니면 허접스런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인문 사회과학자들은 자연과학에 대한 무지를 넘어 과감하게 무시의 단계에 이르고 있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1994년에 간행된 “물리학의 진화”(아인슈타인 저, 과학세대 간)의 펴낸이의 말 3~4쪽에 소개된 다음 일화를 보자. 1983년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서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대화”라는 주제의 토론회가 열렸다. 물리학과 장회익 교수와 같은 과 김두철 교수의 강의(펴낸이의 말에 의하면 이공계 저학년이 들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참으로 평이하고 쉬운 (밑줄 인용자, 이하 같음) 수준의 내용이었다고 한다)가 있은 후 세 번째 네 번째로 등장한 인문과학 쪽의 연사들의 반응을 보자. “두 분의 강의를 잘 들었는데, 너무 어려워서 무슨 얘기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왜 철학과 인문과학의 영역을 침범하는지 모르겠다. 학문 사이에는 엄연한 자기 영역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어려운 용어와 수식들을 사용해 가면서 다른 학문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입장을 바꾸어 놓고 보면 당신들은 기분이 상하지 않겠는가. 제발 물리학자들이면 물리학만 하면 좋겠다. 왜 자연과학자들이 철학자들의 영역인 우주와 인간, 인식과 존재 같은 문제에까지 손을 대는지 이해할 수 없다. ” 참으로 낯뜨거운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한편, 無知의 일종이지만 단순한 無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것이 바로 誤解(오해)이다. 그런데 이 “오해”는 경우에 따라서는 단순한 무지나 무시보다 더욱 해로울 수 있다. 왜냐하면 도무지 자연과학을 공부하려 하지 않는 인문계 학도들이 그 잘못된 내용만을 보고 같은 오해를 하게 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철학사 강의(동경대학교 출판회 엮음, 미래사 간)”에 이런 오해들이 이따금 보인다. (그 나이에 뜬금없이 웬 “철학사 강의”냐고 물을 것 같아 변명(?)을 해 둔다. 이 책은 내가 재학 시절에 보던 주류적 입장에서의 철학사가 아닌, 맑시즘적 입장에서 쓰여진 책이므로 한번쯤 읽어 보라는 권유를 받고 고서점에서 어렵사리 구한 책이다.) 이 책은 서론 부분에서 “과학”을 상당히 강조하여 신선한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에게 있어서 과학 - 자연과학 -은 결국 자신의 철학에 대한 치장물에 불과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저자는 “루이센코”의 학설을 금과옥조처럼 인용하고 있는데, 주지하다시피 이 학설은 오늘날에 와서는 완전한 웃음거리요, 과학계의 수치스런 스캔들의 하나로 회자되고 있을 뿐이다. 기타, 마치 현대의 과학자들이 모두 “변증법”에 입각한 방법론을 사용하여 과학적 연구를 수행한다는 식의 서술과 같은 곡학아세적인 내용들이 너무 자주 보인다는 점에서도 과학의 오·남용이 느껴졌다. 이 책 저자의 아래와 같은 표현(92쪽 각주 2)을 곱씹고 있노라면 더욱 씁쓸한 느낌이 든다. “실제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서 과학자가 획득한 모든 지식-따라서 또한 모든 의문-을 철학의 재료와 과제로 삼아, 그것을 해명한 결론을 실증적인 과학자에게 제시함으로써 실제적으로 테스트해 보게 된다. 과학자와의 사이에 이러한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철학은 비로소 과학을 전진시킬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생산적인 학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떠난 이른바 철학자의 철학은 다만 관념의 곤전에 불과하며, 전문과학자에게는 아무런 존재 의의가 없는 아마추어 철학일 뿐만 아니라, <풋나기들을 속이는> 철학밖에 되지 않는다”
2005년 09월 07일
한국 근대정치사의 쟁점(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 집문당, 1995.)을 읽다가 느낀 소회를 적는다.
이 책 제 Ⅶ장은 김영작교수가 “김옥균 암살사건과 한·청·일 삼국”이라는 제목 하에 김옥균 암살사건과 관련된 기존의 통설을 반박하는 내용으로 쓴 부분인데 매우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그런데 옥에 티라고 할까, 너무도 엉뚱한 사족이 있어 잊지 않기 위해 여기 지적해 둔다. 김교수는 위 책 269페이지에서 김옥균 암살사건 및 박영효 암살미수사건에 대한 일본 재판소의 재판 결과를 소개하고 있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다음과 같다. (같은 페이지 10째줄) “결국, 6월 28일 李逸植마저 무죄석방되는 엉터리 재판으로 끝나 버린다.” 왜 엉터리 재판인가에 대하여는 특별한 언급이 없으나, 아마도 사람을 죽이라고 교사했는데 어째서 무죄가 나왔는가를 납득하지 못하여 "엉터리 재판"이라고 비난한 듯 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 재판은 엉터리였을까? 먼저 각주에 인용되어 있는 판결 이유를 보자. “김옥균에 대한 이일식의 모살교사죄는 아국에 재주하는 조선국인이 조선국인을 교사하여 조선국인을 청국 상해에서 살해한 것으로서, 증거가 충분하지만 일본 형법을 적용해서는 안 되므로 죄가 되지 아니하고,” 한마디로, 외국인의 외국에서의 범죄이므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글 위 판결이 정당한가를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당하는 일본국 형법을 보아야 할 것이다(이 글 말미에 소개). 먼저 제1조는 일본국 형법은 일본 국내에서 범해진 범죄에 적용됨을 선언하고 있다. 이른바 屬地主義를 선언한 것인데, 이 조항을 근거로 즉, 이일식의 교사행위가 일본국 내에서 있었음을 이유로, 이일식의 행위를 일본국 형법으로 처벌할 수 있을까? 이는 곤란하다고 해야 한다. 후술하는 바와 같이 정범인 홍종우의 행위가 일본 형법의 적용 대상이 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한편, 처벌받지 아니하는 행위를 교사하는 행위가 처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공범의 종속성에 반하므로 부당하다. [반대견해(공범독립성설)도 없지 아니하나 공범은 정범의 성립에 종속한다(공범종속성설)고 보아야 한다(여기서는 논증은 하지 않으나 이것이 다수설의 태도이기도 하다).] 따라서 속지주의에 입각하였을 때에도 일본국 형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행위를 교사한 이일식에게 일본국 형법을 적용할 수 없는 것은 옳다고 해야 한다.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조명하여 보자. 일본국 형법은 특정 범죄행위에 대하여는 범죄지를 묻지 아니하고 처벌하고 있다(제2조 내지 제3조). 이일식의 행위가 이에 해당하는지가 문제된다. 그러나 이일식의 행위는 일본국 형법 제2조에 규정된 행위도 아니고, 제3조의 2에 규정된 행위이기는 하나 일본 국민에 대하여 범해진 것도 아니다. 결국 제2조 또는 제3조의 2의 적용도 없다. 그렇다면 당해 재판의 결과는 타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법률에 문외한인 분이 무리를 해 가면서까지 타국의 판결에 대하여 비판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답답하고 서글픈 느낌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기 힘들다. 참고: 일본국 형법
2005년 08월 29일
대법원의 판례들을 시간의 추이에 따라 짚어 나가다 보면 한가지 뚜렷한 경향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법 해석의 요소로서의 "제반 사정"의 목록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요즘 판결문을 읽다 보면 과연 이런 판결이 "법의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가 의심스러울 정도의 것들이 너무도 많다. 이는 결국 하급심의 재량 - 자의에 가까운 - 을 지나치게 넓혀 법적 예측가능성을 해하는 폐단을 가져온다. 예를 들어 다음 판결문(일부)을 보자. 일반적으로 법률행위의 해석은 당사자가 그 표시행위에 부여한 객관적인 의미를 명백하게 확정하는 것으로서 당사자가 표시한 문언에 의하여 그 객관적인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에는 그 문언의 내용과 그 법률행위가 이루어진 동기 및 경위, 당사자가 그 법률행위에 의하여 달성하려고 하는 목적과 진정한 의사, 거래의 관행 등을 종합적으로 고찰하여 사회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맞도록 논리와 경험의 법칙, 그리고 사회 일반의 상식과 거래의 통념에 따라 합리적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이 판결은 법률행위의 해석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대법원은 법률행위의 해석의 기준으로 "동기", "경위", "목적", "진정한 의사", "사회정의", "형평", "논리칙", "경험칙", "사회 일반의 상식" 및 "거래의 통념"을 들고 있다. 어떤가? 이렇게 많은 기준이 제시되고 있으므로 하급심은 판결에 있어 재량이 축소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어지는 내용
2005년 08월 17일
미친 사람과 상담을 했다.
상담한 내용은 생략, 시작부터 워낙 횡설수설을 해대어서 '뭔가 좀 이상하다'라고 느꼈다. 마침내 클O턴과 힐O리가 서울지검 청사에서 레이저총을 쏘고 있으니 막아달라는 말까지 듣게 되자 '아, 이거, 실성한 사람이구나'하고 확신하게 되었다. 별 수 없이, '저희들은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하며 정중히 다른 곳의 도움을 구하시기를 권유했다. 다행히도 특별한 행패 없이 조용히 사무실에서 나가 주었다. 쓸쓸히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며
2005년 07월 02일
先進國이라는 단어가 있다.
또한 그에 대한 단어로서 "後進國"이라는 단어도 있다. 앞장 서서 가는 나라, 뒤따라 가는 나라라는 뜻일 것이다만, 모든 나라들이 가는 지향하는 바가 하나가 아닐진대, 저런 표현을 써도 되는 것일까?
2005년 06월 28일
어렸을 때부터 의문을 품었던 것 중의 하나가, "의식주"라는 단어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단어는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열거한 것이다. 그런데 그 순서를 보면 "옷, 음식, 집"으로 되어 있다. 아무래도 이 순서는 "중요도"를 기준으로 한 것 같은데, 나는 이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은 음식이 없으면 곧 죽지만, 옷이 없다고 죽는 일은 없기 때문에 음식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잠을 안전하게 자기 위해서는 집이 필요하기 때문에 집이 옷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식주의"가 가장 적절한 순서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2005년 05월 02일
정동윤 교수님의 어음수표법 교과서 제4정판 384페이지 밑에서부터 6번째 줄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어음법은 증권의 재료에 관하여 아무런 제한을 두고 있지 아니하므로, 종이 이외의 물건에 기재하여도 상관이 없다. 영미법상으로는 암소의 등과 양 옆에 빨간 잉크로 지급위탁문언을 기재하였던 유명한 암소 수표 사건이 있었다[Board of Inland Revenue v. Haddock(The Negotiable Cow); A. P. Herbert, The Uncommon Law, 112-117(1936)]. 한 마디로 어음 용지 대신 암소 등과 옆구리를 썼다는 말인데, 어쩌다가 암소로 어음을 작성하였을까 하는 호기심에 이 사건의 진상을 추적해 보았더니, 진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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